이하의 아트 뒷담화 18편. 불광동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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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17 09:33
청소년 시절 내 시골집에서는 젖소를 길렀다. 갑자기 우유 산업이 부흥하면서 젖소를 기르는 집이 많아졌다. 정부에서 뭔가를 지원해 주는,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 소와 온종일 생활하는 게 너무너무 좋았다.
 
특히 여름방학에는 새벽에 일어나 젖을 한 번 짜서 식히고, 풀 주고 똥 치우고 사료 주고 경운기 타고 풀 베러 나가고 또 똥 치우고, 소똥은 생각보다 냄새가 좋다. ㅋㅋㅋ 점심 먹고 또 풀 베러 나가고, 저녁에 또 젖 짜고 사료 주고 풀 주고 똥 치우고, 이처럼 엄청난 노동 강도였지만 정말 녀석들과 있는 게 행복했다.
 
사정상 소를 팔 때는 그 녀석도 눈물을 흘리고 나도 울면서 보냈다. 새벽에 태어난 새끼가 비틀대며 펄쩍펄쩍 뛰어다닐 땐 기분이 너무 좋아 같이 펄쩍펄쩍 뛰었다. 새끼를 안고 커다란 병으로 우유를 먹일 땐 녀석이 나를 제 어미로 알았는지 내 품에서 온몸을 비비며 젖을 빨아 먹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소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강제로 내쫓다시피 서울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한테 맞은 적이 몇 번 있는데, 그중에 이런 일이 있다. 앞으로 뭐할 거냐고 물으시기에 소를 키우며 살고 싶다고 했다가 귓방맹이를 맞았다. 젊은 놈이 소나 키우는 게 꿈이냐며 엄청나게 화를 내셨다.
 
동생과 나
 
동생과 나
 
 
 
나의 고향
 
 
가기 싫은 서울로 보따리 하나 메고 억지로 올라왔다. 이모님께서 얻어 주신 방은 보증금 30만 원에 월세 3만 원짜리. 가로세로 2미터, 부엌도 화장실도 없는 방으로 산동네로 유명한 녹번동이었다.
 
처음 직장은 애니메이션 회사였다. 당시엔 컴퓨터가 없어서 전부 손으로 그렸다. 여느 촌놈이 그렇듯이 나도 어리벙벙하고 멍청하고 눈치 없고, 그러나 시키는 일은 잘하는 놈이었다.
 
일을 꽤 열심히 한 거 같은데, ‘작감’이란 놈은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유독 나에게만 신경질적으로 대했다. 어느 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대학도 안 나온 놈이 어쩌고저쩌고…… 이런 말을 들었다. 그날 결심했다. 대학을 가기로.
 
그다음 날 그만두고 바로 대입 단과반에 등록한 다음 공부하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는데, 오∼ 너무 재밌었다. 그해 학력고사에서 240점을 맞았으니 미대치고는 엄청나게 잘 받은 거였다.
 
8월 어느 늦은 밤, 내가 다니던 불광동 독서실 건물 지하에 문이 열려 있기에 그곳이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 들어갔다. 그곳은 바로 말로만 듣던 ‘화실’이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앉아 있다가 날 보고는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 노트를 보여드렸다. 그 노트엔 내가 평소에 끄적거린 그림이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내 그림을 보더니, 재능이 있으니 미대를 가라면서 화실에 다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다음 날부터 다녔다.
 
5개월간 화실에 다니면서 화실비를 한 푼도 낸 적이 없다. 화실비는 당시 10만 원이었다. 방세가 3만 원이었으니 10만 원은 큰돈이었다. 한 달 후 내 수중에 겨우 4만 원이 생겨서 그 돈을 드렸더니 안 받으셨다. 그 아주머니께서 내가 사는 방을 와 보고는 충격을 받으셨다. 네가 이 정도로 가난하게 사는지 몰랐다면서.
 
난 원래 그냥 이렇게 사는 거려니 하고 살고 있는데, 그 아주머니께서는 날 엄청나게 불쌍하게 봤다. 그리고 화실비를 내지 말라고 해서 계속 안 냈다. ㅎㅎㅎ
 
그 후로 그 양반은 툭하면 나를 집으로 데려가 밥을 주었는데, 솔직히 그때 덴푸라, 돈가스, 소시지, 이런 걸 처음 먹어봤다. 당시 내가 살던 집엔 냉장고가 없어서 맨날 밥이랑 고추장만 먹었다.
 
대학 입시가 다가오자 그 아주머니께서 나중에 뭘 하고 싶으냐고 묻기에 아무 생각 없이 미술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미술교육과 원서까지 자신의 돈으로 사 오셨다.
 
실기 시험을 보는데 정말 못 그렸다. 그 방에서 내가 제일 못 그렸다. 입시 미술을 5개월 했으니 제대로 되겠는가.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 들으니 다른 학생들은 중학교 때부터 화실에 다녔다고 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학교 대운동장 거대 게시판에 붙어 있는, 그 수많은 이름 중에 내 이름이 있었다. 공중전화 앞에서 1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시골집에 먼저 전화할지, 아니면 그 아주머니께 먼저 전화할지를 고민했다. 공중전화 앞에는 200명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에 두 군데 모두 했다가는 맞아 죽을 분위기였다.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그 아주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아주머니께서는 괴성을 지르며 좋아하더니, 얼른 자기 집으로 뛰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은 게 그 아주머니를 본 마지막이었다.
 
 
처음으로 미술작업을을 할 때
 
 
 
현재 작업실
 
 
 
사인회
 
 
 
전시장, 인사동 아라아트 센터
 
 
 
전시장, 부산 BEXCO
 
 
 
탄핵전 때, 낙서를 해준 사람들에게 티셔츠를 하나씩 주었다.
 
 
 
제법 잘 된 낙서
 
 
 
작품에 마음껏 낙서하라고 했다. 나중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찌 보면 우리 어머니보다 더 날 따듯하게 챙겨주고 가르쳐 준 은인인데…….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 ‘생깔’ 수 있느냐고?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한(恨)이 좀 있다.
 
가긴 갔었다. 그러나 초인종을 누를 수 없었다. 당시 난 완전히 거지 같은 꼬락서니에 집도 없는, 거의 미친놈처럼 살았으니까.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찾아갈 수가 없었다.
 
군대 제대하는 날, 그날은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낯선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예전 주인은 이사 갔다고 했다. 내가 들은 그분의 마지막 소식은 외국으로 이민 갔다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그분 생각이 난다.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느낌과 장면은 생각난다. 만약에 그 아주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 어머니보다 더 극진히 모시고 싶다. 하지만 그분을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분을 찾아 어머니처럼 모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어린 시절처럼 가난하고 어리숙하고 바보 같고 불쌍한 친구가 많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날 도왔던 것처럼 나도 이 친구들을 돕는 일이다.
 
실제로 나는 돈이 좀 있을 때 등록금 없는 친구에게 조건 없이 준 적도 있다. 나중에 반 정도를 갚기에 그건 받았고, ㅋㅋㅋ 나머진 안 갚아도 된다고 하며 안 받았다. 그 녀석이 곧 결혼한다는 연락이 왔다. 가서 갈비탕 10그릇 먹고 와야겠다. ㅎㅎㅎ
 
암튼 내 운명은 그림을 그릴 운명이었나 보다. 그 운명을 인도해 주신 분이 계셨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나이 마흔이 넘어 다시 받아들였는데, 역시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보다.
 
또 다른 나의 운명은 내가 만든 모든 생산물을 세상에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미천한 재능도, 결과물도, 돈을 번다면 물론 돈까지도. 세상 이야기를 하니까 당연히 세상에 돌려줘야겠지.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다. 기다리라고. 자신의 인생을 믿고, 남이 만든 인생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라고. 잘 기다리는 것도 큰 재능이다.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도울 것이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우리다. 난 기꺼이 우리를 도와줄 거고, 우리는 날 도와줄 거라고 믿는다.
 
 
독립군이 되어라!